슈가렐의 하루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글라세 수역에는 쿠킹비들이 오갔고, 멀리 떨어진 수림에서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렸다.
누미라는 여느 때처럼 슈가렐 곳곳을 돌아보고 있었다.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주고, 문제가 생긴 곳이 없는지 확인하고, 도움이 필요한 쿠킹비가 있다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산길을 지나던 누미라의 앞을 검은 그림자 하나가 가로질렀다.
"……?"
누미라가 걸음을 멈췄다.
그림자는 산길 아래로 사라졌다.
누미라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가 뒤따라갔다.
나무 사이를 지나자 작은 신당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앞에.
검은 여우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누미라와 여우의 시선이 마주쳤다.
여우는 도망가지 않았다.
누미라도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누미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여우의 귀가 움찔했다.
"제가 말을 걸어도 괜찮은가 보네요."
누미라는 신당을 바라보았다.
제단 위에는 검은 공물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식지 않은 차 한 잔이 있었다.
누미라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다시 여우에게 시선을 옮겼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나요?"
여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누미라의 앞으로 다가왔다.
누미라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여우는 손끝 냄새를 맡더니 그대로 손등에 얼굴을 비볐다.
"……따라오고 싶은 건가요?"
여우가 꼬리를 흔들었다.
누미라는 작게 웃었다.
"그렇다면 오늘은 같이 걸어볼까요?"
누미라는 산을 내려왔다.
검은 여우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곁을 따라왔다.
처음에는 몇 걸음 뒤에서 걷더니 어느 순간부터 누미라의 옆으로 붙었다.
누미라는 여우를 내려다보았다.
"제가 어디로 가는지는 알고 있나요?"
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일단 가볼까요."
둘은 글라세 수역으로 향했다.
누미라는 가는 길에 만나는 쿠킹비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누군가 길을 묻자 멈춰서 알려주기도 했고, 무거운 물건을 들고 있는 쿠킹비에게는 마법으로 잠시 도움을 주기도 했다.
검은 여우는 그런 누미라를 계속 따라다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여우가 갑자기 앞으로 뛰어갔다.
"어머."
누미라가 뒤따라가자 길 한가운데 작은 상자가 떨어져 있었다.
상자 안에는 누군가 잃어버린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누미라는 상자를 들어 올렸다.
"이걸 찾고 있었던 쿠킹비가 있겠네요."
여우가 꼬리를 흔들었다.
"잘했어요."
누미라가 여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우는 얌전히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날부터 누미라는 여우가 앞장서면 굳이 막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다음 날.
누미라는 다시 산길을 찾았다.
검은 여우는 신당 앞에 있었다.
누미라가 모습을 드러내자 여우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고 있었나요?"
여우가 누미라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렇군요."
누미라는 웃었다.
"오늘도 같이 가고 싶나요?"
여우는 대답 대신 먼저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누미라는 그 뒤를 따라갔다.
이번에 여우가 데려간 곳은 숲이었다.
나무 사이를 한참 지나자 작은 연못이 나왔다.
누미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에 이런 곳이 있었네요."
여우는 물가에 앉았다.
누미라도 옆에 앉았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고, 물결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누미라는 여우의 털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참 검네요."
여우가 누미라를 바라보았다.
"밤하늘보다도 검고."
누미라가 여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눈은 아주 잘 보이네요."
여우가 눈을 깜빡였다.
누미라는 웃었다.
"칭찬이에요."
며칠 뒤.
둘은 바닷가까지 내려갔다.
누미라는 해변을 걸으며 모래에 파묻힌 조개들을 마법으로 하나씩 끌어올렸다.
검은 여우는 그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마법이 궁금한가요?"
여우가 다가왔다.
누미라는 손가락 끝에 작은 빛을 만들었다.
빛은 천천히 여우 주변을 맴돌았다.
여우가 그것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이렇게 사용할 수도 있답니다."
빛이 여우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여우는 잠시 그대로 있다가 몸을 털었다.
빛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누미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네요."
여우가 누미라를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누미라는 손을 내렸다.
"다음부터는 허락을 받고 할게요."
검은 여우가 누미라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손등에 얼굴을 비볐다.
누미라는 잠시 여우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괜찮다는 뜻인가요?"
여우의 꼬리가 살랑 움직였다.
누미라는 어느 순간부터 여우에게 말을 거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오늘은 어디에 가고 싶은지.
무엇을 보고 싶은지.
어제는 무엇을 했는지.
물론 여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미라는 계속 이야기했다.
"오늘은 글라세 수역에 들렀다가 다시 산으로 올라갈까요?"
여우가 걸음을 옮겼다.
"그쪽이 마음에 드나 보네요."
여우가 앞장섰다.
"좋아요."
누미라는 뒤따랐다.
둘은 함께 걸었다.
어느 날.
누미라는 여우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발견했다.
글라세 수역의 길을 걷던 중.
여우가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누미라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평범한 하늘이었다.
"무언가 보이나요?"
여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산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누미라도 뒤따라 달렸다.
여우는 처음 만났던 신당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제단 앞에 멈췄다.
검은 공물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처음과 달랐다.
공물 옆에 작은 검은 털이 하나 떨어져 있었다.
누미라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여우를 바라보았다.
"당신과 관련된 건가요?"
여우는 제단을 바라보았다.
누미라는 공물에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여우 옆에 앉았다.
"알려주고 싶지 않다면 괜찮아요."
누미라는 여우의 등을 쓰다듬었다.
"모든 것을 말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여우는 가만히 누미라의 곁에 앉아 있었다.
그날 둘은 한참 동안 신당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뒤.
이상한 날이 찾아왔다.
해가 떠 있는데도 슈가렐의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누미라는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이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일식이었다.
그 순간.
검은 여우가 누미라의 곁에서 사라졌다.
"……?"
누미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 갔나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누미라는 여우가 사라진 방향을 따라갔다.
산길이었다.
신당으로 향하는 길.
누미라는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신당 앞에 도착했을 때.
검은 여우가 제단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을 보았다.
여우의 몸이 검은 하늘과 겹쳐 보였다.
마치 그림자처럼.
누미라는 걸음을 멈췄다.
"……검은 신."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이 나왔다.
여우가 누미라를 바라보았다.
누미라는 잠시 침묵했다.
"당신은 신인가요?"
대답은 없었다.
"아니면 신이 보낸 존재인가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누미라는 웃었다.
"역시 알려주지 않겠군요."
그녀는 여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제단 옆에 앉았다.
"괜찮아요."
누미라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굳이 제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일식이 깊어졌다.
세상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누미라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검은 여우도 떠나지 않았다.
둘은 나란히 앉아 검은 태양을 바라보았다.
일식이 끝났다.
빛이 다시 슈가렐에 내려왔다.
누미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돌아갈까요?"
검은 여우가 먼저 산길을 내려갔다.
누미라는 뒤따랐다.
이번에는 여우가 앞장섰다.
숲을 지나고.
강을 건너고.
글라세 수역을 지나.
다시 처음 만났던 신당까지.
여우는 멈추지 않았다.
누미라는 문득 웃었다.
"제가 따라가는 게 익숙해졌네요."
여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당신이 저를 따라왔는데."
누미라는 여우에게 다가갔다.
"이제는 제가 당신을 따라가고 있네요."
여우가 꼬리를 흔들었다.
누미라는 잠시 여우를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여우가 먼저 다가왔다.
손끝에 얼굴을 비볐다.
"앞으로도 같이 걸을까요?"
여우가 누미라의 옆에 섰다.
"좋아요."
누미라는 여우와 나란히 걸었다.
어디로 갈지는 정하지 않았다.
어디까지 함께할지도 몰랐다.
다만 그날부터.
누미라가 슈가렐을 돌아다닐 때면 검은 여우가 종종 그녀의 곁을 함께 걸었다.
누미라는 여우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다.
정체도 캐묻지 않았다.
그저 함께 걷고,
함께 쉬고,
함께 슈가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가끔.
하늘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날이면.
누미라는 옆에 있는 여우를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검은 신과의 동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것이 신과 관리자의 만남이었는지.
한 마리 여우와 한 쿠킹비의 우연한 동행이었는지.
혹은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인연이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누미라 역시 굳이 답을 찾지 않았다.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